2013. 2. 15. 15:06ㆍ나의 이야기/나의글
Nickname(별명 : 別名)
Nickname(별명:別名)은 사람이나 사물의 실제 이름대신 쓰이는 이름이다.
주로 겉모습이나 성격, 행동, 말씨, 경력 등을 바탕으로 어떤 특징을 나타내는
별명이 지어진다. 별명은 보통 부모 이외의 사람(친구, 주변사람, 대중)들이
붙여주며, 부르는 사람이나 불리는 사람 모두에게 친근감이나 짓궂음 같은
감정을 환기시키는 기능이 있다.
나에게는 별명이 참으로 많다.
내가 처음으로 별명을 가진 것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이다.
남자 선생님이 담임이었는데 나는 반에서 성적이 항상 상위권에 들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생각하기에는 나는 두뇌가 아주 좋은데
노력을 덜 하는 학생으로 생각 하셨던지 항상
나더러 좋은 두뇌를 썩힌다고 핀잔을 주셨다.
그 시절에 도리스 데이(Doris Day)의 Que Sera Sera가 한참 유행이었다.
가사를 보면 “되고 싶은데로(원하는 데로) 되어라“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한국에서는 이 노래의 제목을 “될 데 로 되라”로 번역을 했다.
선생님이 하루는 모든 학생 앞에서 “김 xx, ‘Que Sera Sera’앞으로 나와.”하셨다.
나를 노력도 안하는 게으름뱅이 낙천가?로 취급하시다니...
그 다음부터는 친구들이 모두 나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케 쎄라 쎄라’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 해 보니 나에게 아주 어울리는 닉네임을 주신 것 같다.
나는 본래 성격이 낙천적인 편이다.
어릴 때에는 더 낙천적이고 놀기를 좋아하는 게으름뱅이 학생이었다.
너무 놀기를 좋아해서 학기말 시험을 앞에 두고 얼음판에서 놀다가 넘어져서
팔에 기브스를 하고 왼손으로 글을 써야하는 곤욕을 치루기도 했으니.
중학교 입학 시험에서는 기브스를 안해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두 번째 별명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에 담임선생님이 주신 것이다.
독일어를 가르치시는 신세대가 좋아하는 아주 쿨(cool)하신 선생님이셨다.
나는 이 쿨한 선생님한테 잘 보이려고 독일어를 아주 열심히 공부해서
독일어 점수만은 아주 좋았다.
지금은 다 잊어 먹고 독일어를 한마디도 못하지만.
담임선생님이 짓궂고 엉뚱하셔서 가끔가다가 생각지도 않은 질문을 하셨다.
그 시절에는 주번이라는 것이 있어서 점심때가 되면 주번이 커다란 물 주전자에
뜨끈뜨끈한 보리차를 식당에서 받아서 교실로 가져와야했다.
보리차를 담은 주전자가 무거워 식당에서 교실로 가져 오려면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주번이라 보리차 주전자를 들고 3층에 있는 교실로 들어오니
담임선생님이 갑자기 나한테 생년이 언제냐고 해서 “1849년입니다”하니
교실 안이 폭소로 난리가 났다.
내가 잘못 대답한 것도 모르고 얼굴이 벌게져서 선생님을 쳐다보니
“야 네가 나의 할아버지냐?”하셨다.
그때야 내가 잘못 대답을 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물론 나의 닉네임은 ‘1849년’이 되었다.
세 번째의 나의 별명은 내가 예과를 다닐 때에
가입한 클럽에서 얻은 것이다.
그 클럽은 겨울에는 농촌에 봉사 활동을 다녔다.
다 큰 처녀가 남자애들과 봉사활동을 한다고 2주간을 캠핑을 하면서
같이 지내니 엄마가 허락을 하시지 않았다.
그래도 한달을 두고 매일 졸라서 결국 봉사 활동을 가게 되었다.
클럽에는 나보다 3살 정도 많은 치과대학을 다니는 학생이 있었다.
나의 친구오빠의 친구라 그냥 오빠라고 부르면서 내가
따르던 사람이었다.
캠핑 첫날에 신입멤버는 자기소개를 했다.
내 차례가 되어 일어서서 xx대학에 다니는 xx라고 나의 이름을 말하니
갑자기 그 오빠가 일어나더니 첫 봉사활동에 참가한 기념으로 닉네임을
주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닉네임이 너무 생각지도 못한 ‘우량아’
나는 얼굴이 벌게지고 다른 멤버들은
기찬 닉네임을 주었다고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다.
내가 키도 좀 크고 건강하게는 생겼지만 뚱보는 아닌데 남자학생에게나
어울릴 닉네임을 받아서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하던지.
나중에 그 오빠의 말로는 내가 너무 귀엽게 통통해서 그런 별명을 주었다고.
그 시절에는 분유통의 선전에 나오는 건강한 애기의 모습이 참 인기였으니.
지금 오빠도 할아버지가 되었겠지?
네 번째의 나의 별명은 내가 인턴을 하던 때에 같이
인턴을 하던 여자 친구들이 붙여준 것이다.
그때 인턴 장(인턴을 관리하는 의사)이 마취과 과장님이셨다.
과장님이 성격이 불같고 무서워 요구사항이 있어도 아무도 요구사항을
과장님께 가지고 가겠다는 인턴이 없었는데
내가 마취과에 적을 두고 시작한 인턴이라
내가 자진해서 해 보겠다고 나섰다.
아침 일찍 꽃 한 다발을 사들고 과장님께 가서 커피를 끓여드린 후에
모든 요구사항을 제출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그 요구 사항이 모두 통과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 커다란 요구 사항도 아니였는데...
#1 아침 식사를 인턴 숙소에 가져다 줄 것.
#2 여자 인턴 숙소에 따로 전화기를 설치해 줄 것.
이 두가지였다.
친구들이 어떻게 과장님을 살살 녹였으면 요구 사항이 100%통과가 되었냐고?
그때에 친구들이 붙여준 닉네임이 ‘살살이’였다.
'살살이'와는 거리가 먼 성격과 모습을 가진 나인데....
다섯 번째의 별명은 내가 뉴욕에서 방사선과 수련을 받을 때였다.
수련의의 유니폼이 하얀색의 짧은 코트와 스커트였는데
스커트 대신에 나는 일하기에 아주 편한 청바지를 입었다.
미국에 와서 제일 좋았던 것이 청바지 입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체격이 특별히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청바지가 몸에 잘 맛았다.
내가 가끔가다 유니폼 스커트를 입으면 너의 청바지를 세탁소에 보냈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의 이름 앞에는 항상 blue jeans(청바지)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이 닉네임은 나도 무척 좋아했던 것이었다.
Blue jeans Dr. Kim...
여섯 번째의 나의 별명은 딸아이의 친구들이 준 것이다.
쌘디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는 딸아이 친구들을 불러서
각종 음식을 만들어 주기를 좋아했다.
생일 파티도 내가 만든 음식으로 했고 또 학교 밴드부에서 모금 행사가
있으면 나의 18번인 쵸코렛 쿠키를 많이 만들어 보냈다.
딸이 내가 만든 쿠키가 제일 인기가 있다고 했다.
딸이 나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인 줄 알았는데 모금 행사에 가보니
정말 내가 만든 쿠키가 제일 먼저 다 팔렸다.
잎에 넣으면 사르르 녹는 쿠키라고.
고등학교까지는 딸애의 겨울 코트, 치마등 내가 만들어 입힌 적이 많았다.
그래서 쌘디 친구들이 나를 르네쌍스 우먼( Renaissance woman)이라고 불렀다.
루네쌍스 우먼은 다방면에 재주가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불러준 닉네임 증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마지막 별명은 다른 사람이 준 것이 아닌
내가 나 자신에게 준 것이다.
지금 이 음정에서 쓰는 ‘bluepoppy’이다.
이 닉네임은 내가 사진을 올리는 인터넷 Flickr에 사진을 올리면서
어떤 닉네임을 쓸가 찾고 있던 중 Flickr에 올린 이 himalayan blue poppy를 보고
한 눈에 반해 나의 닉네임을 '불루파피'로 만들었다.
이 불루파피를 집에서 키우기 위해 두번 씨를 심었는데 아직 성공을 하지 못했다.
올봄에 한 번 더 씨를 심어 보려고 한다.
원산지가 히말라야 산이라 그런지 참 청초하게 보인다.
이 불루 파피처럼 언제나 싱그럽고 맑은 마음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
히말라얀 불루파피
Romance Suite from 'The Gadfly' Op.97a
Whatever will be,will be
무엇이 되든지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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