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만한 우리 집 만두

2013. 1. 31. 09:54나의 이야기/나의글

 

 

 

 

 

 

 

 

 

 

 

 

 

 

 

 

강아지만한 우리 집 만두

 

 

 

나의 친정 엄마의 고향은 이북 황해도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음식이 이북식이다.

이북식 음식들은 이남식 음식과 맛도 다르고 또 모양도 다르다.

특히 크기가 아주 다르다.만두도 그중에 하나다.

 

 

 

겨울만 되면 우리 집은 거의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만두를 먹는다.

김장김치에 두부 그리고 돼지고기 약간이 만두의 속을 만드는 재료의 전부다.

아침을 먹고 밀가루 반죽부터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이 반죽을 공기가 통하지 않게 싸놓았다가 오후 3-4시쯤 되면

만두피를 만들기 시작한다.

요새는 반죽을 미는 방망이가 있지만 옛날에는 다듬질하는 방망이를 썼다.

이 만두피를 만드는 몫은 항상 언니차지였다.

언니는 그냥 묵묵히 불평 없이 만두피를 잘도 밀었다.

아마 나는 나이가 어려서 잘 시키지 않은 것 같다.

우리 집의 만두피의 크기는 조금 과장해서 어린 아이의 얼굴만큼 크다.

그 속에 준비해둔 만두의 속을 넣는다.

우리 집 만두는 5-6개 정도 먹으면 배가 부르다.

그런데 맛이 일미다.

 

 

 

 

나는 1973년에 의대를 마치고 인턴만 끝내고 수속이 되는 데로

언니가 있는 미국에 가고 싶어서 인턴 자리를 찾던 중 한양대학 부속병원이

새로 생겨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모집한다고 해서

병원도 구경할 겸 학교 친구들과 구경을 갔다,

친구들이 인턴모집에 응해서 나도 다들 고르고 남은

마취과에 적을 두는 인턴에 지원서를 내었다.

여자 인턴 6명중 다섯 명이 우리학교 출신이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1973년에는 인턴이 매일 열 시간 이상의

근무와 하루 걸러서 당직을 했다.

당직을 하는 날은 34시간의 근무를 해야 했다.

그러니 먹는 것을 잘 먹고 영양 보충도 가끔 해서 체력을 키워주어야 했다.

그런데 한양대 부속 병원은 건물만 뻔드레하고 식사는 형편없었다.

닭국이 나와도 닭고기는 볼 수 없고 그때의 보양식이던

불고기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인턴들이 스트라이크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

모두 호텔에 모여 3-4일을 지내면서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었다.

 

 

 

 

 

그때 인턴을 통솔 하시던 의사가 마취과 과장님이셨다.

우리가 숨어 있는 장소의 정보를 얻기 위해 과장님이 딸을 우리 집에 보내셨다.

물론 엄마는 내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르셨고.

엄마가 '지금 만두를 끓이고 있으니 먹고 가라고 하셨다'.

우리 집의 이 유명한 만두를 과장님 딸에게 대접을 했다.

처음으로 먹어보는 이 커다란 이북식 만두에 놀랐던지

또는 감격을 받았던지 소문을 내어

스트라이크가 끝난 후에 병원에 돌아오니 모두들

김 선생집의 강아지만한 만두 좀 먹어 봤으면 좋겠다한다.

그때는 얼마나 창피 하던지?

나의 주먹의 반도 되지 않는데 강아지만한 만두라니.

 

 

 

 

이 강아지만한 만두 얘기를 남편한테 하니

자기네 집도 만두가 무지 크다고 한다.

우리 시집은 개성분들 이다.

남편의 기억으로는 어릴 때에 집에서 만두를 먹는 날이면

자기 몫으로 딱 한 개의 커다란 만두가 주발에 담겨져 나와

너무 커서 먹기도 전에 질려 이리저리 쿡쿡 쑤셔보고

먹지를 않아 어머님이 참 미워하셨다고 한다.

 

 

 

 

그때 먹던 만두가 생각이 나 만들어 보지만 똑같은 맛이 나질 않는다.

나의 미각이 변해서 그런지?

자료가 달라서 그런지?

손맛이 달라서 그런지?

 

 

 

 

강아지 만한 아니 나의 주먹만한 엄마가  만들어 주신 만두가 그립다..

 

 

 

 

 

 

 

 

 

 

엄마가 좋아하시고 너무나 아름답게 키우시던 꽃 :  아프리칸 바이올렛..

시카고 보타닉 가든에서

 

 

 

 

 

 

 

 

 

 

 

 

그리고 이 음악..참 좋아하셨는데...

Edvard Grieg's Solveig's Song